사회·경제

금속노조 18일 박창수·정경식 열사 의문사 사인 규명 요구하며 진실화해위 앞에서 집회

뉴스필드 2022. 10. 17. 18:32


기억하기 위해 밝혀야 합니다
이유가 없는 죽음, 의문사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 반드시 진상규명으로 보답해야
금속노조 18일 박창수·정경식 두 열사의 사인 규명 요구하며
진실화해위 앞에서 집회 열고 의견서 전달

■ 일시: 2022년 10월 18일(화) 13시
■ 장소: 진실화해위원회 앞 (서울시 중구 퇴계로 173. 남산스퀘어빌딩)
■ 주최/주관: 전국금속노동조합

○ 우리 사회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가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의문사가 여전히 미해결의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으로 남아있습니다.

○ 2020년 12월 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2기가 출범한 후, 2021년 5월 27일 조사개시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 학살,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3년의 시한을 가지고 진실규명 조사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약칭 추모연대) 등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온 단체들은 2021년 초 미완으로 남아있는 의문사 사건 중 20건을 추려 진실화해위에 진정 접수하였습니다. 사건 중에는 독재 및 권위주의 정권의 유지를 위해 동원되었던, 안기부(중앙정보부, 현 국정원), 보안사(기무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경찰 등이 자행한 의문사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20건의 사건은 모두 지난 2020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를 진행했으나 관련 기관의 비협조와 수사권이 없는 조사의 한계, 기간 부족의 이유로 진실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2005년 출범한 1기 진실화해위에 진정접수의 형식으로 사건을 다시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건조사는 진전 없이 모두 성과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 2020년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과 의문사 사건 재조사에 들어간 지 14개월이 지났으나, 각종 의문사 사건은 국가의 직접 개입을 밝히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 의문사 사건의 진상이 여전히 어둠 속에 놓여있는 동안 시간의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 많은 유가족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남은 이의 상당수도 고령으로 진실 규명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은 유가족은 2기 진실화해위가 의문사의 진실을 풀 마지막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의 모습은 유가족의 열망에 답하지 못하고 실망과 분노만을 쌓고 있습니다.

○ 금속노조는 18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아 1991년 돌아가신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와 1987년 돌아가신 정경식 열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밝히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취지의 집회를 열고 진실화해위가 온 힘으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서를 전달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누리는 자유와 정의는 자신의 목숨으로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열사의 희생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가 나서서 진상 규명의 형태로 그 빚을 일부나마 덜고, 특히 억압의 주된 당사자였던 국가가 반성의 의미로 재조사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 박창수 열사(당시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
1958년 7월 28일 부산 출생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당선    
1991년 2월 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19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
1991년 5월 6일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


박창수 열사는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 배관공으로 입사한 후 1986년 8월부터 어용노조 퇴진 및 위원장 직선제 쟁취를 위해 노조 개혁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박위원장은 1990년 7월 노조위원장 선거에 당선되었고,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91년 2월 10일 제3자 개입금지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수감 중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5월 6일 새벽 4시 45분 안양병원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그러나 사망 직전 옥상에 함께 올라간 동행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당시 박위워장과 한진중공업 노조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전노협, 대기업연대회의 탈퇴 및 와해 활동이 안기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졌으나, 국정원의 자료공개 비협조와 은폐로 아직 진상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 정경식 열사(당시 대우중공업노동조합 창원지부 조합원)
1959년 12월 15일 출생
1987년 6월 8일 외출 후 실종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정경식 열사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하여 1987년 2월경 회사의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중식 거부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5월경 노조 대의원·지부장 선거에서 민주파 대의원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주파 활동가 모임에 참석하는 등 민주노조 건설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87년 5월 노조 지부장 선거와 관련하여 지지 후보가 달랐던 반대파 조합원 이모씨와의 상해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고소로 경찰서 출두요구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 8일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1988년 3월 2일 창원공장 인근 불모산 기슭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당시 창원경찰서와 마산지검은 열사가 이모씨와의 폭력사건 합의가 어려워지자 구속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종 당일인 1987년 6월 8일 변사현장에서 목을 매어 비관, 자살한 것으로 수사종결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동지의 사건은 실종에서부터 변사사건 내사종결까지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조작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상 규명촉구 서한]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창수·정경식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 조사에 최선을 다하라!


1991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회사와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조선소 내에 있는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자 당시 노태우 정권과 김우중 대우자본은 곧바로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소속 사업장 대표자들은 긴급하게 간부들을 소집해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1991년 2월 10일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수련회에서는 대우조선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파업기금을 모으자고 결의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 하던 중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참석했던 간부 69명 전원을 강제연행 해 갔다. 경찰은 간부들을 연행한 후 위원장급 8명은 대공분실로 끌고 가서 강압적 조사를 하고 ‘제3자 개입금지’ 혐의로 구속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간부들은 여러 경찰서로 나누어 75시간이 넘게 조사를 한 후 훈방 조치했다. 이때 당시 한진중공업 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열사도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수감된 박창수 열사는 1991년 5월 4일 구치소 운동장에서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이마 34바늘을 꿰매고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박창수 열사는 재소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중환자실 출입문 앞은 구치소 교도관들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수감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5월 6일 새벽 4시 30분경 박창수 열사는 안양병원 1층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됐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정경식 열사가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한 뒤인 1986년 5월 경, 노조민주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같은 공장 대의원들과 함께 당시 대의원 선거와 지부장 선거를 준비하며 민주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중에 발생했다. 정경식 열사는 지부장 선거 과정에서 폭행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폭행사건의 피해자인 이동석과 합의를 모색했다. 1986년 6월 8일 오전 9시경 정경식 열사는 이동석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외출을 나간 후 실종되어 9개월이 지난 1988년 3월 2일 경남 창원의 불모산에서 유골상태로 발견됐다.

박창수, 정경식 열사의 죽음이 제대로 조사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사건조사 방향과 조사 기조가 세워져야 한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폭발한 민중의 분노에 직면하여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반대하는 재야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결국에는 ‘6. 10민주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이는 다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가장 탄압을 받아오던 노동자의 대정부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 따라 노동운동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대응 전략도 급격하게 변화를 하게 된다. 87년 7·8·9월의 대투쟁을 겪으면서 정권과 자본은 민주노조 운동으로 공안탄압 방향을 바꾼다. 그 중심에 바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대기업노조 연대회의가 있었다. 전노협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만들어 낸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으로 지역과 사업장에서 자발적으로 타오른 노동조합 결성의 힘을 모아 전국 단위 연대를 만들었다. 이를 억누르기 위해 정부는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고 초법적인 탄압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안기부와 보안사는 용공분자 색출과 방위산업체 보안지원 활동을 이유로 수시로 사업장을 출입하며, 노동조합 활동에까지 개입해 들어오게 된다.

진상규명 위원회 1기 조사에 따르면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서는 사노맹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안기부 홍상태 요원이 한진중공업에 들어와 당시 박창수 위원장 집행 간부들에게 접근했고, 노골적으로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박창수 위원장이 대기업연대회의 사건으로 구속되자 박창수 위원장을 조기 석방시킬 수 있는 길은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 탈퇴라고 간부들을 회유하며 구속된 박창수 위원장을 설득하라고 종용했다. 그리고 임금인상에까지 개입하며 민주노조 와해 공작을 지속해서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의 경우 진상규명위원회 1기 조사에서는 당시 보안사와 경찰이 노조 지부장 선거 과정에 발생한 폭행 사건을 가지고 정경식 열사가 민주노조 활동을 포기하도록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정경식 실종사건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초동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정경식 열사가 이동석의 전화를 받고 나간 후 실종이 되었다면 그가 만났던 관련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수사 했어야 하나 이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찰 개입 정황 증거들이 있음에도 아직도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은 두 의문사 사건이 30년 전에 발생하였기에 가해자에 대한 직접 조사와 진실규명을 위한 고백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서 ‘대기업노조연대회의’ 간부들을 연행한 것 자체가 불법이었음이 재판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구속의 사유가 된 ‘제3자 개입금지’는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는 악법으로 폐지됐다.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 탈퇴를 종용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박창수 열사가 서울구치소에서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에 대한 정황도 구치소측에서 불려 주는 대로 적었다는 당시 구치소 재소자들의 진술 또한 밝혀진 상태다. 박창수 의문사 사건은 당시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국가의 공권력이 자행한 박창수 의문사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는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기 바란다.

정경식 의문사 사건은 정경식 열사가 실종되고 나서 보안사와 경찰이 충분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민주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지금이라도 실종 당시 정경식 열사가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관련자 조사를 철저히 한다면 사건의 진상은 밝혀질 수 있다. 진실화해위는 정경식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보안사, 경찰, 대우중공업 직원 등 관련자에 대해 철저히 재조사하라.

민주노총 금속노동조합은 수사권이 없는 진실화해위 조사의 한계를 알고 있다. 하지만 조사관들의 철저한 조사활동을 통해 사건에 접근한다면 진상규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실제로 몇몇 사건은 한계와 방해에도 진실 규명에 성공했다. 국가기관의 비협조와 은폐 행위가 있으면 이를 시민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할 의무 또한 진실화해위는 가지고 있다.

향후 금속노조는 박창수·정경식 조합원의 의문사 사건 조사과정을 철저히 주시할 것이다. 진상규명 조사에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금속노조는 두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이 명백히 밝혀질 때까지 전 조합원의 단결된 힘으로 투쟁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 촉구 서한을 위원회에 전달하고자 한다.

2022년 10월 18일 전국금속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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